네덜란드 국가교회 내 복음송의 도입: 1834년 분리운동 내에서의 반응
리머 페이버(Riemer Faber, 워털루대학 고전학 교수)
번역: 이스데반 목사 (4M 자라가는교회)
서론
1834년의 분리는 네덜란드 국가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 내에서의 자유주의와 거짓 교회정치에 대항하는 하나의 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국가교회로부터 일부 회중들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송(Evangelische Gezangen), 즉 종교적 노래(spiritual songs)의 모음집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분리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송은 도입된 내용과 양식 모두에서 성경적 진리와 개혁신앙으로부터 탈선한 증거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송은 분리운동을 위한 촉매가 되었고 새로운 회중의 공식적 결정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실로 예배 중에 종교적 노래를 부르는 일은 19세기 초반에 매우 넓고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이른바 “찬송쟁점(Gezangenkwestie)”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세대를 걸쳐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성경적인, 인위적인 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분리된 교회들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들(해방파)과 그들의 선조들인 개혁교회들(Gereformeerde Kerken)을 통하여 캐나다 개혁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복음송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작곡된 192편의 종교적인 노래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인들 중에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크리스티안 헐렐트(Christian Gellert, 1715-1769), 프리드리흐 클롭스톡(Friedrich Klopstock, 1724-1803), 헤이올흐 느우말크(Georg Neumark, 1621-1681), 요도커스 판 로던스테인(Jodocus van Lodenstein, 1620-1677) 그리고 아이작 왓츠(Issac Watts, 1674-1748)입니다. 광범위한 주제들이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 믿음과 신뢰, 기도 그리고 죽음과 불멸에 대한 묵상을 포함합니다. 주제와 어조에 있어서 이 노래들은 다양한 신학적 및 철학적 개념을 포함하는데, 알미니우스주의, 합리주의, 청교도주의, 이신론 그리고 관용론을 포함합니다. 비개혁파적인 노래 중 하나는 72번 찬송인데, 동료에 대한 동정심으로부터 필요할 때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을 위한 축복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높이 존중되어야 함을 함축합니다.
특별히 19세기에 정통 신자들이 싫어했던 것은 31번 찬송이었습니다. 이 찬송은 “오 인간이여 너의 가치를 깨달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77번 찬송은 공덕을 지성 및 인내와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알미니우스주의 노래로 일컬어졌습니다. 21, 43, 62 그리고 68번 찬송은 판 로던스테인이 쓴 시들인데 경건주의적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들 중 몇몇 찬송은 심지어 가장 가혹한 개혁파 진영의 비평에 의해 승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찬송의 사상, 어조 및 음조에 의해 주어진 전체적인 인상은 그 찬송들이 17-18세기의 비정통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많이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분리운동의 리더들은 이 찬송집의 약점을 항변파적이고 초자연주의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임으로 요약했습니다.
네덜란드 국가교회 최고위원회가 지명한 협의회에서 편찬한 복음송집은 1807년 주지사들의 명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확대회의를 통한 교회의 조언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교회 관리기관(Kerkbestuur)은 이 복음송집을 사용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면직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교회를 일탈로 이끄는 잘못된 가르침을 포함한 것으로 인식된 복음송은 분리운동 지도자들의 비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분리운동 지도자들의 관점
H. P. 스홀터
이들 지도자들 중 한명인 스홀터(Hendrik Peter Scholte, 1805-1868)는 네덜란드 국가교회 내에서 교리적 및 교회론적 표준의 타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관용주의와 자유주의 때문에 비개혁파적 가르침과 행위가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18세기 동안 계몽주의 및 칭송받은 문명화는 사람들을 이끌어 개혁파 가르침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부적합한 것으로 믿게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교리문답 교육은 피상적이 되었고 설교단은 더 이상 신자들을 건전한 성경적 교리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인 개혁파 가르침 대신에 목회자들은 얄팍한 사랑, 평화, 그리고 인내를 촉진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의 양날가진 검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원리에 기초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스홀터는 1618년 도르트 총회의 결정에 따라 예배 중에 불러야 할 150편의 시편 찬송에 대한 변화된 태도 가운데, 신학적 및 교회론적 기준의 퇴보를 보았습니다. 스홀터는 빈정대는 어조로 자유주의 지도자들이 운율 시편 찬송을 부르는 “문제의 해결” 방식에 대해 씁니다. 시편 찬송이 포기될 수 없다는 점에 비추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시편 찬송은 충족된 복음의 정신과 어조로 작곡된 종교적인 노래들에 의해 “보충”될 수 있었습니다. 스홀터는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서 교회는 시편 찬송을 불렀다는 점과 사도들은 회중들의 건덕을 위해 시편을 사용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시대에 복음송 모음집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개혁파 신자들을 제외한 모든 부류의 노래 부르는 자들을 위한 모든 부류의 재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스홀터는 현대 사상가들에 의해 촉진된 한심한 관용과 “소위 말하는 사랑”에 특별히 반응합니다. 그는 70번 찬송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찬송은 원수를 향한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는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하는 것과 적의 맹공을 당하는 것이 고상한 미덕임을 강조함으로써 의인과 악인 사이의 대조를 억압합니다. 스홀터는 특별히 자신의 교리문답 설교에서 복음송 안에 있는 이런 점과 또한 다른 비개혁파적인 가르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복음송 부르기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아니면 복음송집 안에 있는 시들 중 일부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스홀터는 판 로던스테인의 시들을 좋아했습니다. 분명 그 안에는 청교도적인 요소들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또한 스홀터는 그 자신 및 다른 정통주의 신자들이 살았던 박해의 시기에 어울리는 로던스테인의 분쟁에 관한 시(네덜란드어-“strijdliederen”)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H. 더 콕
헨드릭 더 콕(Hendrik de Cock, 1801-1842)은 분리 운동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인데 복음송을 공격하는 강한 어투로 쓴 책자를 통해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글은 복음송집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책자의 도입부입니다. 여기에서 더 콕은 복음송을 “개혁파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교리로부터 유혹해내는 사이렌(Siren)의 사랑노래”로 묘사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사이렌이 노래를 불러서 선원들이 올바른 항로에서 벗어나게 하고 배가 바위에 부딪쳐 침몰하게 하는 것처럼 복음송도 매혹적인 이단사설을 가지고 개혁파 신자들을 정통주의의 경로에서 끌어낸다고 본 것입니다.
더 콕은 복음송들이 예견적 믿음에 근거하는 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 부분 부패 그리고 다른 알미니우스주의 개념들로 특징지어졌고, 이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이 옹호되고 문화적 진보가 칭송받고, 동료에 대한 관용이 촉진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호소하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복음송의 내용은 세 일치 신조의 가르침과 대립되었습니다. 더 콕은 복음송집을 “소위 말하는 복음송”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복음송이 불신자들에 대한 정죄와 의인들에 대한 구원이라는 온전한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독자는 분리운동의 시기와 그 이후로 더 콕이 공예배시에 시편찬송만을 부르도록 요구한 점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A. 브루멀캄프
안토니 브루멀캄프(Anthony Brummelkamp, 1811-1888)는 복음송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송이 회중에게 억지로 요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섬겼던 많은 교인들에게 복음송이 던진 장애물에 반대했습니다. 독자들은 여러 해 동안 총회가 열리지 못했고 교회는 협의회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브루멀캄프에게 의미한 것은 1618년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된 것이 계속 유효하다는 점이었는데, 공예배시에 다윗의 시편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1835년 8월에 교회 정치 협의회가 헬덜란트(Gelderland) 주에서 열렸을 때 브루멀캄프는 복음송 부르기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텀(Hattem) 회중에게 선언했는지 확인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브루멀캄프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복음송의 정신과 음색 그리고 복음송을 회중에 도입하는 동기가 개혁파 교리에 상반되고, 종교적인 노래에 공감하지 못하는 많은 신자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결국 브루멀캄프는 도르트 총회의 결정 중 하나를 취소한 현 총회의 결정을 알지 못하므로 자신이 교회질서에 위반되게 행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브루멀캄프는 “찬송쟁점”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찌르는 문제가 되었고 자신의 회중 가운데 정통주의 교인들은 요구된 대로 예배 중에 하나의 복음송을 부르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일부 회중은 마지막 복음송을 부르기 전에 교회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과시하듯 모자를 쓰거나 복음송을 부르는 동안 일어섰습니다. 브루멀캄프는 그들이 복음송을 부르는 일을 통해 교회 안으로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반대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브루멀캄프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일이 정숙하고 질서있게 되도록 책임을 가진 목회자로서 그의 의무는 부과된 규칙으로부터 나온 혼란인 “찬송쟁점”에 의해 손상되고 있었습니다.
브루멀캄프 목사의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교회 통치기관의 고려사항들 중 하나는 공예배 중에 복음송을 불러야 한다는 1807년 1월 1일 지방대회의 결정에 따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루멀캄프는 1816년에 도입된 교회 통치기관(Hervormd Kerkbestuur)의 권위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송을 부르도록 제시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하여 브루멀캄프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었지만, 브루멀캄프는 복음송을 부르지는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을 면직하기에 불충분한 근거라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브루멀캄프는 복음송 부르기 문제에 할당되어야 할 합당한 가치를 알았고, 위기에 처한 것은 종교적인 노래들이라기 보다는 비개혁파적 내용을 가진 특정한 노래들이라는 점도 알았습니다.
1834년의 분리
분리자들의 공적 언급이 규정된 분리 혹은 복귀의 선언(the Declaration of Secession or Return) 안에서 새로 형성된 회중은 “우리의 공예배가 유서 깊은 교회 예전에 따라 인도받기를”희망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시편찬송에 관해서 본다면, 이는 1773년에 출간된 운율 시편찬송집으로 돌아감을 의미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변화는 총회의 규제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분리운동 신자들의 초기 예배는 시장, 경찰, 또는 군인에 의해 방해받았습니다. 위협 또는 실제적인 방해에 반응하여 정통주의 신자들은 표준적인 칼빈주의의 “군가”(battle song)인 시편 68편 1-2절을 부르곤 했습니다. 찬양집에서 1절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어나실 것이니 / 그의 모든 대적은 도망갈 것이요 ...”로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기뻐 외칠 것이요 / 하나님의 승리의 권능 안에서 기뻐할지어다 ...”
분리운동의 몇몇 지도자들은 교회 및 국가의 법률 위반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1834년 11월에 체포된 스홀터가 있었습니다. 스홀터는 수감 기간 그의 일상을 기록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읽기, 기도 그리고 시편찬송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시편 34편 찬송을 부름으로 그의 영혼이 고무된 후에 스홀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때 진정한 영적 필요가 무엇인지 배우고 나서, 신적 위로의 넘치는 자원인 다윗의 시편 속에서 충분한 자양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 있는 시편찬송을 교회로부터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된 인간적인 노래들을 여전히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만큼 시대정신은 세속적이고 피상적인 판단으로 감각을 오도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분리운동 교회들은 정부 그리고 법을 집행하도록 지명된 사람들에 의해 용인되었습니다. 회중이 세워졌을 때 예배 중에 회중 찬송과 관련한 특정한 관례가 발전되었습니다. 일부 회중은 1566년 다윗의 시편집을 사용하면서 고풍의 운문으로 돌아갔으며, 다수는 1773년판 운율 시편집을 사용했고, 매우 일부의 경우에 예배중 하나의 복음송을 부르는 관습이 유지되었습니다. 이제 목회자들은 공예배시에 부를 시편송을 선택하고 1편부터 150편까지 순서대로 부르는 관습을 버렸습니다. 이런 변화는 회중 찬송이 예전과 설교 본문에 더욱 밀착되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찬송 부르기로 돌아간 것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칼빈주의적 뿌리로 그리고 1618년 도르트 총회에 의해 제시된 연합의 초기 형태로 돌아가려는 의식적인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시편찬송 부르기는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분리운동 신자들의 핵심적인 활동의 일부였습니다. 시편찬송 부르기는 항상 기쁨, 위로, 공동체, 자유, 그리고 교회와의 연합이라는 감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결론
시편송, 복음송, 종교적인 노래 부르기에 관한 역사 안에서 전술한 내용으로부터 볼 때, 1834년의 분리운동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적 및 합리주의적 내용 중에서 성경적 가르침 및 개혁파 신앙고백에 상충되는 복음송 부르기에 대한 혐오는 네덜란드 국가교회 내에서의 자유주의적인 경향과 증대되는 부적절한 통치에 대한 정통주의 신자들의 반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분리운동 교회의 첫 총회는 오직 시편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점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공예배가 아닌 상황에서 종교적인 노래들을 부르는 것은 통상적이었음을 덧붙여야 합니다. 분리운동 사람들이 국가교회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불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많은 분리운동 신자들이 찬송과 관련한 문제를 왜곡하지 않았거나 혹은 받아 마땅한 이상의 비중을 이 문제에 두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분리운동은 동시대적고 인위적인 종교성을 가진 노래들을 통한 이단의 유입 가능성을 식별했습니다. 분리운동의 지도자들은 특정한 종교적 노래들 가운데 촉진된 가르침에 초점을 둠으로써 성경과 개혁신앙의 가르침에 대조되는 철학 및 대중적인 신념 안에 있는 조류에 주목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복음송의 비성경적 언어와 세속적인 음조에 관해 신자들에게 경종을 울렸습니다. 개혁신앙에 계몽주의 사상을 결합하려는 동시대적인 사조를 식별하는 가운데 분리운동은 인위적인 곡들은 대중적인 신념 또는 철학 속에 흐르는 사상을 도입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또한 분리운동이 종교적 찬송 자체를 부르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분리운동은 복음송 안에 포함된 시의 ‘내용’에 반대했습니다. 분리운동 지도자들은 성경이나 신앙고백으로부터 나온 찬송을 사용하는 것에 대항하여 왈가왈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종교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습니다. 분리자들이 반대한 것은 네덜란드 국가교회의 공적 찬송집 안에 포함된 많은 노래들 안에 있는 비성경적인 그리고 비개혁파적인 가르침입니다.
분리운동 지도자들은 시편찬송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분리운동은 구약의 시편 부르기를 촉진하면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칼빈주의적 근원으로 그리고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된 교회의 원리와 실천으로 돌아갔습니다. 보편교회가 150편의 시편찬송이라는 금고를 보유하고 있음을 가리킴으로써, 시편이 초대 교회 신자들의 예전과 일상 속에서 기능했음을 말하는 신약의 구절들을 가리킴으로써, 시편의 구속사적 기능과 성경적 언어, 표현 및 의미를 보존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분리운동 교회들은 시편찬송의 지속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The translator(Jeong-Hwan Lee) thanks Dr. R. Faber for his permission to translate this article into Korean and to distribute it for free access.
*원 자료는 다음과 같다. Riemer Faber, “The Introduction of Evangelical Hymn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The Reaction in the Secession of 1834”, Clarion, 2003, vol. 52., pp. 582-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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