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바빙크 컬렉션 55

은혜의 교리는 죄짓게 하지 않는다

사실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버린다면, 복음에서 그 생명력인 피를 뽑아내는 것과 같아서,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주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은혜는 복음의 영혼입니다. 은혜가 없는 복음은 죽은 복음입니다. 은혜는 복음의 음악입니다. 은혜가 없는 복음은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중생한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넘치는 은혜는, 은혜의 단절은 절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의로 묶여진 띠입니다. 중생한 자녀들은 거룩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의무를 달콤한 것으로 느끼며, 주님을 경외함으로 온전한 거룩함을 갈망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새로워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본능들을 발휘합니다. 중생한 ..

은혜 언약의 전개 방식

은혜는 자연과 다르고 더 높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자연과 연결되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도리어 회복합니다. 은혜 언약은 자연적 출생을 통해 물려주는 상속물이 아니라, 인류의 자연적인 관계 속 깊숙한 바닥에 흐로는 시냇물입니다. 은혜 언약은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뛰어넘지 않고, 역사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가족과 후손 그리고 민족들을 통해 전개됩니다.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 신앙 안내서, 244-245.

은혜 언약의 공동체성

역사 속에서 은혜 언약은 단 한 번도 분리된 독립적 개인과 맺어진 적이 없었으며, 항상 한 사람과 그의 가족,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교회와 그들의 자손과 함께 맺어졌습니다. 이 약속은 신자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집에도 적용됩니다.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 신앙 안내서, 다함, 244

이스라엘에 대한 율법의 역할

실제로 율법은 약속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에 더 가까워지도록 하나님의 손길에서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이동의 자유가 없는 죄수처럼 가두어두었습니다. "초등교사"로서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동행하며 한 순간도 놓지 않았습니다. 보호자이자 보살피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감독하며 그들이 약속의 필요성과 영광을 알고 사랑하도록 도왔습니다. 즉, 율법이 없었다면 약속과 그 성취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곧 이교 사상에 빠져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와 민족 사이에서 자신의 모든 위치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오랫동안 고립된 상태로 보존해 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지키고자 하신 집단을..

칭의와 성화의 차이

죄는 죄책이지만 동시에 오염이기도 하다. 칭의는 사람을 죄책에서 구해내는 것이며, 성화는 사람을 죄의 오염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칭의를 통해서는 사람의 의식이 변화되며, 성화를 통해서는 사람의 존재가 변화된다. 칭의를 통해서는 다시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되고, 성화를 통해서는 다시 선해지며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개요, 크리스천다이제스트, 584.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멸망하는가?

여기에 어려운 문제가 있다.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멸망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명확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푸치우스, 호른베이크, 살데누스, 크니버는 우리가 판단할 때 신중할 것을 권고한다. 자살은 물론 멸망에 합당한 큰 죄이지만, 이 죄가 끔찍하더라도 죄인은 여전히 의롭게 될 수 있다.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은 이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이 아니라 이 사람의 전 생애를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용서를 받으려면 모든 죄에 대해 분명하고 명백한 회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심하게 시험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역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말하면, 자살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 예를..

주일성수의 방법

일요일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소극적으로는 평범한(육체의) 일과 이익을 가져오고 생계를 위해 무언가를 벌어들이는 모든 일을 삼감으로써 지킨다. 신성한 예배와 직접 관련된 모든 일(마 12:5; 요 5:8-9), 자비를 베푸는 모든 일(마 12:10; 요 5:9; 9:14; 눅 13:15), 모든 필요를 위한 모든 일(막 2:27)은 허용된다.   따라서 유대인의 엄격함은 없다! 음식을 요리하고 불을 피우고 이부자리를 펴고 옷을 입고 먹고 걷는 일은 확실히 허용된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요일을 지켰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휴식은 여전히 부정적일 뿐이어서 그 자체로 가치가 없으며 긍정적인 것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는 안식은 회중 집회(레 23:3; 행 1..

안식일 변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인함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로 구성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만장일치로 일요일을 지켰다. 따라서 이 변화는 신성한 권위에 따라, 사도들과 교회들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변경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찾을 수 없더라도 놀라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구약의 모든 예식을 폐지하고 대체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할례 폐지에 대한 공식적인 계명도 없다. 아이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여성은 반드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의 계명 역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대 기독교인은 세례와 함께 할례를 오랫동안 계속 실천했다.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참고 17-24절). 성령은 능력이나 힘으로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교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