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바빙크 컬렉션 55

중생과 말씀의 관계

그러므로 중생은 말씀 '아래에서, 말씀 '곁에서, 말씀과 '함께' 일아난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직 말씀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일하실 수 있다는 그런 개념으로 중생이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덕과 함께 성령님은 그 자신을 창조의 교제에 묶으시지만, 말씀 안에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사역을 가두거나 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곧 말씀인데, 초자연적으로 주입된 능력에 의해 은혜를 수여하는 마술적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성례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향해 자신의 은혜를 높이고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는 조건, 때, 경로를 제공한다. 복음의 설교는 필요하고 유익한 것인데, 중생한 사람들은 이런 수단에 의해 하나..

말씀과 성례의 관계

그러나 개혁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을 가리키는 말로 함께 다룬다. 개혁파는 성례를 말씀에 종속시킨다. 왜냐하면, 말씀을 떠나서 성례는 성례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례 양편 모두의 경우 우리에게 선포되는 것은 말씀이다. 하나는 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는 것이다.   양편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양편 모두 동일한 은덕을 지시한다. 만일 통상적으로 은혜의 방편이 그저 도덕적 작용만을 소유한다면,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점은 분명하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351.

은혜의 방편에 수반하는 은혜

은혜의 방편 그 자체는 도덕적 작용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은혜의 방편은 그 자체로는 재창조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방편 안에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은혜의 방편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한 선하심 안에서 방편을 도입하고 방편을 통해 일하시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런 방편에 비의존적으로 남으신다.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 안으로 내려오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은혜와 성령으로 직접, 확고하게,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신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350. https://catechism.tistory.com/1513 은혜의 방편의 작용방식-바빙크그것들은 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정한 목적에 따라서 믿음 ..

은혜의 방편의 작용방식

그것들은 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정한 목적에 따라서 믿음 안에서 이들 신적 능력으로 도입된 수단들을 사용하고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은혜를 수여받도록 자신을 묶으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런 수단들 안에서 우리에게 스스로 빚을 지셨다. 우리가 타당한 방식으로, 즉 어린아이같이 순종함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들에 기초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기대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통해, 즉 자신의 약속들을 통해 우리의 모든 영적 그리고 물리적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자신을 묶으신다.   따라서 은혜는 사실 수단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수단에 주입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단..

중생과 그리스도의 관계-바빙크

성령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으신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완전함으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논리적 개념으로 볼 때, 중생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선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데, 이는 나중에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나기 위함이다. 오히려 중생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열매이며 성령님이 그리스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복음의 말씀과 함께 연결된 상태에서만 성령에 의해 존재하게 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기독교의 범주에서 볼 때, 중생은 은혜 언약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이 전파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286.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허락하기 전에, 그는 자신이 죄 사함을 위해서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죄악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세례는 그의 편에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행하라고 주신 그 일에 전적으로 굴복하며 헌신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 일을 위하여 그를 전적으로 구비시키시고 준비시키시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전적인 굴복이요, 공적으로 그의 모든 백성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메시야의 활동 무대에 들어가는 왕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헤르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오히려 이런 것이다. 즉, 그런 사람이 모든 객관적인 계시와 주관적인 조명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한 자신이 진리를 진리로 알았고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인 의도를 갖고서 그 진리를 거짓말이라 부르고 그리스도를 사탄의 도구로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적인 죄가 마귀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그 죄는 의심과 불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회와 기도의 가능성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그런 죄인 것이다(요일 5:16). 의심과 불신앙, 후회와 기도의 순간을 이미 완전히 넘어서 버린 상태다.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 인정받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마귀적인 사악함으로 그를 모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정의 상태에서는 죄가 그 수치의 자취를 다 떨어내 버리고, 겉에 둘러싼..

창세기 3장의 뱀은 실제의 뱀인가?

여자가 뱀의 꾀임에 속아서 범죄를 저질렀다(고후 11:3; 딤전 2:14). 여기서 뱀을 하나의 상징적인 현현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제의 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뱀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고 지혜로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3:1; 마 10:16). 그러나, 계속해서 전개되는 계시로 볼 때에, 마귀적인 능력이 뱀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고 그를 곁길로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구약의 몇 군데에서 이미 사탄이 사람을 대적하는 자요 미혹하는 자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욥 1장; 대상 21:1; 슥 3장).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68.

불신자의 기도

불신자는 올바르고 진실하게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기도의 의무는 모든 선행과 함께 불신자에게도 요구된다. 또한 하나님의 법은 불신자에게 기도해야 할 의무를 부과할 뿐 아니라, 올바르게 제대로, 즉 영과 진리로 기도할 것을 명령한다. 불신자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오직 그의 책임이다. 따라서 불신자는 죄악 된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기도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므로, 차라리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불신자에게는 영적인 지각은 없을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선하심을 이성과 본성에 의거해 안다. "새롭게 되지 않는 사람이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 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본성적으로 지각하고, 하나님의 위엄과 선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