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은 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정한 목적에 따라서 믿음 안에서 이들 신적 능력으로 도입된 수단들을 사용하고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은혜를 수여받도록 자신을 묶으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런 수단들 안에서 우리에게 스스로 빚을 지셨다. 우리가 타당한 방식으로, 즉 어린아이같이 순종함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들에 기초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기대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통해, 즉 자신의 약속들을 통해 우리의 모든 영적 그리고 물리적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자신을 묶으신다.
따라서 은혜는 사실 수단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수단에 주입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단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은혜가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수행하는 목회자의 권위와 통제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혜는 자신의 주권적이고 선한 즐거움을 따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수여하시는 하나님의 자산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정당하게 말하자면 은혜의 방편이 시행될 때마다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지들과 영적이고 비가시적 은혜 사이의 연합이 마치 이들 양자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국지적으로 묶이고 서로 결합하는 것인 양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혼과 은혜 사이에 연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중세에 심오하고 경건한 신학자 보나벤투라가 말했던 방식이다. 그는 컵이 물을 담거나 알약이 약물을 포함하는 것처럼 성례는 그 자체 안에 은혜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오히려 성례는 은혜를 표지하고 가리킨다. 만일 은혜가 성례 때문에 수여된다고 주장한다면, 은혜는 가시적 표지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령자의 영혼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후대에 개혁파 신학자 가운데 고마루스가 표지된 것이 표지에 연합되기보다는 우리에게 연합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 것 역시 동일한 개념 안에서 표현한 것이었다.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사이에 일어난다. 그리고 은혜의 방편들은 표지이자 봉인으로 기능한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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