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인용]개혁파의 스콜라기법 차용 배경-바빙크

V.D.M. 이스데반 2020. 1. 20. 17:32


종교개혁 시대에 일어난 가장 초기의 신학자들은 그들이 진리를 제시한 그대로 가능한 성경에 근접하게 머물렀다. 중세의 스콜라적 신학의 책임은 모두에게 명확했다. 교회의 교리와 삶 속으로 스며들어온 오류들은 스콜라적 신학의 결과로 혹은 적어도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났다. 믿음에 대한 진리들을 다루는 미묘한 방식이 중세 기간 동안 통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가장 초기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반대하는, 종이 한 장 차이의 그리고 생소한 스콜라주의의 구별에 반대하는, 중세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방법에 반대하는 반응에 의해 어느 정도 동력을 부여받았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 그대로의 타협되지 않은 순수한 진리를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갔다. 멜랑흐톤의 교의학은 실제적으로 바울의 로마서를 강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원천적으로 사도신경의 강해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이 이 지점에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은 매우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의 무리 내에서 그들이 고백했던 진리를 한층 더 발전시켜나가기 위한, 그것의 내적 연결 관계를 분명하게하기 위한, 다른 영역에서 사람들이 획득한 진리의 총체에 그것을 연관시키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둘째,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주의자들, 재세례파주의자들, 소키누스주의자들 등과 논쟁함으로써 그들이 고백했던 교리들의 매우 분명한 설명을 제공하도록, 모든 영역에서 이 교리들을 다듬고 완성시키도록 짐을 부여 받았다. 그들이 이 과업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논리, 심리학, 철학의 기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를 조사해야 했고, 다양한 오류들과 이단들에 대한 응답 속에서, 이전 시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수행한 것들을 수확해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한번 칭송되었다. 그리고 교부와 중세 신학자들의 저술들이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열렬하게 참조되었다.


이런 새로운 접근은 마코비우스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개혁 이후 가장 이른 시기 동안 이미 나타났다. 멜랑흐톤은 매우 빨리 아리스토텔레스와 철학에 대한 자신의 중상으로부터 후퇴했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는 일에 더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공부했다.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신의 평가 속에서 꽤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 이후에 나온 신학자들을 참고할 때, 철학과 스콜라주의에 대한 친밀도가 점차로 증가한 것을 빠르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외의 경우 마터(Martyr), 폴라누스(Polanus), 잔키우스(Zanchius), 피스카토르(Piscator), 그리고 화란의 경우 트렐카티우세스(Trelcatiusses) 부자, 고마루스(Gomarus),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저술들이 이런 주장에 대한 적절한 증명이다.


헤르만 바빙크,  Saved by Grace, 5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