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안식일 개념-우르시누스

V.D.M. 이스데반 2021. 9. 28. 18:37

 

그러나 우리가 토요일이나 수요일, 혹은 그 외의 다른 날에 매여 있다거나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적 교회는 자신을 유대인의 회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자유를 발휘하여, 한 주간의 제 칠일 대신 첫째날을 택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날에 일어났는데, 바로 그 부활로 말미암아 내적이며 영적인 안식이 우리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도덕적으로든 아니면 의식적으로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특수한 면에 따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면에 따라서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교훈을 받고 성례를 시행하는 특정한 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날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883.

 

스데반의 생각

우르시누스는 주일 결정이 사도들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그 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날이어서 의미가 있었고, 유대인의 안식일과 구별을 둘 수 있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예배를 위해 특정한 날이 필요하지만 특정한 날에 매여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유추라고 본다. 우르시누스 이전에 칼빈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따라서 우르시누스는 칼빈의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나 또한 '일곱'이라는 수에 교회를 묶어 예속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만약 미신이 없다고만 한다면 나는 교회들이 그들의 모임을 다른 엄숙한 날에 가지는 것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오직 훈육과 선한 질서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곳에는 미신이 없을 것이다. ...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가르침을 특별히 붙들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서 종교가 몰락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한 모임들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돕는 외적인 도움들을 누려야 할 필요가 있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 문병호 역, 생명의말씀사, 279-281. (II, 8.34).

 

스데반의 생각

청교도와 칼빈의 생각은 차이점이 있는데, 이는 시대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칼빈의 경우는 특정한 날에 미신적인 요소를 부과하는 당시 시대 배경 속에서 특정한 날 만이 안식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넓은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칼빈 후기 시대에 속하는 청교도의 경우 당시 포고된 오락령(Declaration of Sports, 1618)으로 말미암아 주일 오전 예배 후의 시간들이 세속적인 놀이와 오락으로 가득하게 되어 예배와 경건 생활에 해를 끼치는 상황을 개탄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청교도들은 안식일 엄수를 주장하면서 예배와 경건을 위한 철저한 주일 성수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칼빈과는 달리 매주의 첫날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질적인 차이점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주일 성수라는 공통적인 분모 안에서 나타나는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 하다. 매주의 일곱째 날에서 매주의 첫날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의 날이 이동된 것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선택으로 보든지(칼빈은 율법의 그림자의 폐지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보든지(청교도들은 창조 규례의 연속적 관점에 치중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는 양 측이 구속사의 관점에서 주일을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에서는 차이가 없다.

  칼빈은 자발적인 공동체적 예배와 경건의 실천을 위한 날로  주일을 바라보고(당시의 날에 대한 미신적인 요소들의 부과에 반대하여 주일 자체에 대한 강한 구속력을 주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는 이에 더하여 신자의 의무로써 보다 엄격한 주일 성수를 강조한다(하나님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구속력을 강하게 부과한다). 그러나 매 주의 첫날을 주일로 지킨다는 점에서(그것을 명령으로 보든지 선택으로 보든지),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예배와 교육에 집중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날로 구별하여 지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것이 주님이 오시기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칼빈의 관점과 청교도의 관점은 공통분모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