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위일체 교리가 유효한 속죄를 요구한다. 성경에 의하면, 선택하시는 이는 일차적으로 성부로서(요 6:37-40;17:2, 6, 9-10; 엡 1:4),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선택하신다. 또한 성령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에게만 적용시킨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불신앙을 고집하다가 결국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보편적 속죄는 성부는 일부의 사람을 선택하고(조건적으로), 성령은 그 복음을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적용하지만, 성자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이것이 잠정적 속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엔 삼위일체를 분열시키는 위험이 있다. 그것은 신론에 혼란을 야기한다. 성부와 성령이 성자와 다른 목표를 갖게 된다. 이것은 삼신론적 경향을 보여 주며, 신성의 통일성이 훼손된다.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무너진다. 역사적으로, 잠정적 보편 속죄의 교리 다음에는 항상 그런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뒤따랐다. 알미니안 논쟁의 벽두에, 도르트 저항파의 지도자였던 시몬 에피스코피우스는 성부만이 홀로 신성을 갖고, 성자와 성령은 본질에 있어 종속적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 문제는 "성삼위의 사역은 불가분적이다"라는 원칙을 기억하면 더욱 심각해진다. 비록 어떤 일은 성삼위 중 한 위가 달성할 때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만(예를 들면, 오직 성자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성삼위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 위가 하시는 모든 일에 관여하신다. 이를테면, 십자가로 가시는 분은 성자지만 그를 십자가로 보내시는 분은 성부다. 그러고 나서 성자는 영원한 성령을 통해 자신을 성부께 드린다(히 9:14). 그러므로 성삼위의 세 위 모두가 일부 사람을 선택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들에게만 구원을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정적일 뿐인 속죄를 제공하는 것으로 변경했다면, 혼란은 더욱 악화 된다. 하나님의 통일성이 깨어질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설성이 훼손된다. 그분의 목적의 견고성과 신뢰성이 어디 있는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신으로부터 어떤 확신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들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추 신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복음의 본질이 무시되는 것이다.
로버트 리탐, 그리스도의 사역, IVP, 244-245.
스데반의 생각
비단 보편속죄 뿐만 아니라 어떤 논지를 전개해 나가다 보면, 삼위의 일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삼위의 구별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치 성부만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성자와 성령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이다. 삼위의 구별성과 삼위의 일체성은 둘다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특정한 사역을 한 위격에 돌리더라도 삼위 모두 거룩한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 또한 유지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잃어버려도 안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잃어버려도 안된다. 이런 점에서 훈련의 부족함이 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야겠고, 의도적인 결함이 있다면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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