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신학 논문들을 읽을 때가 있다. 단편 논문집 같은 것을 읽을 때가 있는데, 신학적인 논구는 치밀하고 정확하게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논문들이 목회적 적용, 즉 교회적 실천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결론에서 보여주는 경우는 잘 없다. 조직신학논문이든 성경신학 논문이든 마찬가지다. 그런 논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패커 박사의 말대로 신학자의 임무는 더러운 오염을 정화하여 교회로 순화된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설교와 예배인도에서 이런 점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시가 논문마다 포함되어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래야 신학교의 바르고 정당한 성경적 신학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고매한 신학적 논의들을 논문집 안에만 가두어 놓고 있지는 않은지 신학논문을 쓰는 분들은 항상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읽는 자의 역량에 따라 신학적 논의들을 자신의 목회에 스스로 적용할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전개하는 신학적 논지를 목회적 적용으로 이끌어 내어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될 수 있도록 지침을 준다면 더욱 나을 것이다. 전개하는 신학적 논지가 과연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전도와 설교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의 성경해석과 조직신학적 해석이 바람직한 것인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면 신학교의 논문들이 학교 안에서만 갇혀있는 일은 잘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런식으로 적용을 추가하게 되면 학문적 가치가 떨어지고 이상한 논문이 되고 마는 것인가? 그런 적용을 도외시하도록 학문적 논문만을 쓰도록 요구한다면 바로 이런 지점에서 신학과 교회적 실천의 분리가 가중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왜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들은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거부하면서도 합동이나 합신이나 고신이나 통합이나 할 것 없이 교회 안에 영접기도식 사영리식 전도를 용납하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있는가? 왜 신학자들은 이런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오류의 지점에서 침묵하거나 얼버무리고 마는가? 조국교회 안에서 신학과 실천은 언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인가? 신학자의 책임인가 아니면 현장 목사의 책임인가 아니면 둘다의 책임인가? 통일이 되면 사영리 쪽지를 들고 북한으로 갈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실로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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