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중생은 말씀 '아래에서, 말씀 '곁에서, 말씀과 '함께' 일아난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직 말씀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일하실 수 있다는 그런 개념으로 중생이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덕과 함께 성령님은 그 자신을 창조의 교제에 묶으시지만, 말씀 안에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사역을 가두거나 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곧 말씀인데, 초자연적으로 주입된 능력에 의해 은혜를 수여하는 마술적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성례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향해 자신의 은혜를 높이고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는 조건, 때, 경로를 제공한다.
복음의 설교는 필요하고 유익한 것인데, 중생한 사람들은 이런 수단에 의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수여하신 새로운 생명을 의식하고 확신하게 된다. 중생은 사람의 가장 핵심부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다. 바람이 불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요 3:8). 중생의 시점과 방식은 결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했는지는 우리에게 설교되는 말씀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임 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함 가운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날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369, 374.
스데반의 생각
전반부는 비중생자에게 말씀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즉 비중생자에게 말씀의 선포는 중생이 베풀어지는 은혜의 자리를 제공하는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유아들은 언약의 자녀들로 말씀과 성례가 베풀어지는 공예배에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언약 유아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은혜의 자리에서 성령께서 중생시키고자 하시는 사람을 중생케 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중생의 은혜를 베푸시지 말씀을 '통해' 중생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직접 사역인 중생은 또한 말씀과 떨어지지 않는다.
후반부는 중생자에게 말씀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즉 중생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믿음과 회개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중생자에게 말씀은 성령을 통해 믿음과 회개로 나아가게 하는 수단이다.
이처럼 말씀은 비중생자에게 그리고 중생자에게 각각 은혜의 수단이 되지만 그 수단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에게는 은혜가 주어지는 때와 자리를 마련하는 수단이라면, 후자에게는 믿음과 회개를 드러내게 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목사는 복음의 순수한 선포를 위해 열정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것으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복음의 순수한 선포를 제쳐두고 다른 프로그램에 목을 메며 살아가는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바빙크의 중생론>을 번역하면서 10번 이상을 읽어본 것 같다. 그러나 정식 출간 되고 난 이후 서서히 정독하면서 다시 읽고 있다. 아마도 서너번은 더 정독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 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앙감정론>은 보다 체험적이라면 <바빙크의 중생론>은 보다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입장에서 중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목회와 설교를 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두 책은 목사의 서재에서 반드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링크
https://catechism.tistory.com/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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