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산책

상번제의 의미-칼빈

V.D.M. 이스데반 2024. 1. 8. 18:53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즉 성령님의 은밀하신 영감에 의하여 신앙의 조상들은 중보자에게로 인도하심을 받았었다. 이 중보자의 죽음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이후로는 유화하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신앙의 조상들이 드린 모든 희생의 제사들도 단지 속된 도살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출 29장 38절 이하 주석 서론

 

두 마리의 양을 매일 제사함으로써 하나님께 화목을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들이 죄가 있고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찾도록 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 양의 희생제사는 기름으로 만든 과자와 포도주의 술과 함께 드린다. ...
  그런데 술과 기름의 향기는 단지 영적인 진리를 보여주는데 불과하다. 즉 그 백성들이 희생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믿음과 회개를 동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성 없는 외적인 의식만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
  외부적인 맛을 내어 제물을 드리도록 하함으로써, 백성들이 마음속 깊이 회개하는 감정을 품게하며, 순전한 믿음을 갖게하여, 자기들이 잡아 드린 그 양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약속된 그 희생제물(즉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 죄악의 용서를 찾도록 하나님께서 일깨우시는 것이다. 이 희생제사를 '상번제'라고 일컫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모든 세대를 걸쳐서 계속적으로 드리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통해서 볼 때 이 상번제도 역시 임시적인 제사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상번제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기 때문이다(단 9:27). ...
  이로부터 우리는 이 희생제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는 이 희생제사가 당신 앞에 '향기로운 것'이 되리라고 약속하고 계신다(민 28:2).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와 온전히 화목하셨고, 우리들의 죄악들을 도말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려 단 한 번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비록 한 번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성결케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해서 배울 점이 있다.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택으로써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출 29:38-41 주석 중.

칼빈주석, 신교출판사, 263-266.

 

스데반의 생각

칼빈은 구약의 제사 속에서 제사드리는 사람이 희생 동물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약속된 희생제물(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갔음을 확고히 한다. 창 3:15절 이후로 '여자의 후손'은 처음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속에 죄사함과 영생을 가져다 줄 중보자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 행위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뿐이다. 칼빈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속된 도살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구약 속에는 중보자에 대한 제시가 상징과 그림자와 의식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희미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희미하지 않은(희미한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으리요?) 그러나 간접적인(그러나 불충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은) 제시라고 봄이 타당할지 모른다. 신약은 물론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행적을 나타냄으로 직접적이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시가 희미하거나 약하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시도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다만 구약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때때로 부족하여 그 강렬함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할 따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묻는다면 제사를 드리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전망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정답이다. 우리가 회고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구 자체는 구약에 직접 적혀 있지는 않지만, 구약을 차근차근 집중해서 읽어나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창세기부터 죽 이어져 오는 구약의 내용들 속에 이 사상이 꾸준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