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산책

선행은 구원의 조건인가?

V.D.M. 이스데반 2019. 2. 22. 21:36

선행은 구원의 조건인가?

 

대다수의 사람이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고 선행으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은 그대로 정당하다. 그러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왜인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여기서 믿음은 도구적(수단적) 조건이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공로가 되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떤 점에서 도구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심과 죽으심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도구가 된다. 내가 죄사함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해 내 죄가 예수님께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을 얻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과 죽으심의 순종(이것이 의다)을 믿음에 의해 전가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위한 도구적(수단적) 조건이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심과 죽으심만이 공로적 조건이 된다. 인간의 행위는 죄로 더렵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선행 자체만으로는 되지 않고, 믿음과 결부되어 움직인다. 즉, 믿음이 발휘되는 결과로 필연적으로 선행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행은 결과적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선행이 없다면 이는 믿음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아닌 것을 증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행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데, 이것이 곧 야고보서가 주장하는 바다. (한때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으나,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고 나서 반성했다.) 선행 자체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이 참된 믿음과 결부되어 결과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따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구원받는다. 종교개혁의 sola fide(오직 믿음으로)가 의미하는 바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선행이 증명하는 바로 그 참된 믿음만을 통해서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신칭의가 행위를 강조하지 않아서 교회가 타락하고 있다고 이신칭의 교리를 재고해야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오히려 칭의에 있어서의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곧 성령의 중생의 은혜로 주어지는 살아있고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게하는 믿음임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만을 드높이되 선행이 그 은혜 안에서 반드시 발휘된다는 것을 강조 또 강조하였다. 선행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결과적' 조건(믿음에 반드시 수반된다는 의미에서)인가? 성경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고백한다. 율법 폐기론과 율법주의 두 이단은 모두 성경적 칭의 교리 안에서 설 자리가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