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교회는 말씀과 성령을 거의 완전하게 연합시킨 나머지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완전히 상실해 버릴 위험에 처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성령의 구원하는 은헤를 말씀 속에 가두어 두고서 성령이 오로지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임할 수 있다고 보는 데까지 나아갔다 ...
개혁 교회들은 결코 이런 견해를 취할 수가 없었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포용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원리가 이 문제에도 그대로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이 매우 친밀하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나 그 둘은 서로 구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령께서는 말씀 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고, 때때로 그렇게 역사하신다. 성령이 친히 말씀과 함께 역사하실 경우는 그가 친히 그렇게 하시기로 자유로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그는 보통 말씀과 연결되어 역사하시며, 말씀이 있고 또한 선포되는 곳에서, 즉 은혜 언약의 영역에서, 교회의 교제 속에서 그렇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령께서는 루터파의 생각처럼 성경이나 선포된 말씀 속에 사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서 교회 속에 사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말씀이 마치 그의 능력의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서 역하시는 것도 아니다. 말씀의 역사와 자신의 활동을 함께 묶으시기도 하지만, 성령께서는 개별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으시고 그것을 새롭게 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크리스챤다이제스트,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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