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산책

빌리 그레이엄에 대한 생각

V.D.M. 이스데반 2019. 5. 14. 18:31

빌리 그레이엄은 2018년 2월에 별세했다. 그의 별세 1주기를 지나면서 이 분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피력해 본다. 우선 근래에 이분의 사역 초기부터 중반기 그리고 후반기에 해당하는 설교들을 들었다. 그의 메시지는 일관적이다는 것이 나의 평가다. 메시지의 내용이 일관되고, 설교 형식이 일관적이고, 설교의 마무리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그리고 삶의 변화로 압축된다. 그의 설교에는 복잡함이나 지루함이 없다. 그렇다고 허접하거나 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평이한 대중 전도자에게 어울리는 가장 적합한 형태의 설교를 했다. 말하자면 그는 성격과 대상에 맞는 설교(대중 전도집회에 맞는)를 했다. 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입술로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손을 사용하여 말하는 설교자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약간 차분해지기는 했다. 그는 매우 자주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설교한다. 이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본다. 즉 자신의 설교가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 대한 그 자신의 강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 부분도 좋게 본다. 그러나 따라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대중 전도 집회 전도자는 아니므로.

 

설교의 마무리는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변화 없다. 초청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는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는 대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말하는듯 하다. 아마도 초청에 응하여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에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청에 응하여 나온 사람들 중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거듭난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셨다면 회개와 믿음은 사람이 끌어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듭났다면 믿고 회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초청하여 결신하도록 이끌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순간적인 의지의 결단으로 초청에 응한 것이, 이로써 회개와 믿음을 고백한 것이 자신이 그리스도인되게 만든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초청 "의식"은 분명히 성령님의 중생 사역을 뒷전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즉 빌리 그레이엄은 앞 부분에서는 건전한 복음의 기초를 설명했지만 이 모든 것을 인간이 취하는 결단 속으로 수렴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기독교를 "결단 의식"의 기독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결단 의식의 통과 여부를 그리스도인됨의 여부로 만들게 된다.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를 통해서 회심하고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결단 의식"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중생의 역사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빌리 그레이엄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전도 집회에서 초청은 해서는 안되는가? 그렇지 않다. 초청은 필요하다. 설교에서 초청은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단 의식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는 초청하고 기도하는 것까지는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개인적인 결단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나 영접기도와 같은 의식을 통과하고, 이것에 안위와 소망을 두게 한다면, 이것은 은혜의 복음에 대한 도전이 될 뿐이다.

 

현대 전도의 대부분이 이러한 유형의 전도법에서 벗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마지막 부분이 잘못되면 은혜의 복음은 자연주의적 종교가 된다. 영생은 인간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낚아챌 수 있는 것이 된다. 삼위일체적 구원에 있어서 성령님의 적용사역 대신에 "결단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높이 들려진 곳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빼버리는 방식으로 복음의 전체 구도는 뒤틀린다. 

 

분명 빌리 그레이엄은 부분적으로 옳았고 매우 옳았으며, 성공적이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틀렸고, 복음의 적용에 있어서는 심각한 오류를 생산했다. 성령님의 중생의 역사로 주어지는 회개와 믿음을 인간의 결단과 의지적 고백이라는 결과물로 대체시켜서 적용하려 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역사는 이러한 인간의 오류들을 넘어서도 역사하시고, 자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빌리 그레이엄을 사용하신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바른 신학은 바른 설교를 낳고, 바른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합당하게 높인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빌리 그레이엄식 전도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구원의 복음을 성경대로 전하는 일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적용 사역을 성령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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