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의 내면적인 원리와 행위에 대해 무지하고 부르심의 은혜가 언제 주어질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솔하게 어떤 사람에게 이 죄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이 죄를 추상적으로 정의하기는 쉽지만,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죄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죄 및 이 죄와 관련된 모든 정황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고, 만일 우리가 이 죄를 인식할 수 없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 죄를 범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사도 교회에 주어졌던 영들을 시험하는 은사를 통해서 특별하게 이 죄를 알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결과와 정황으로부터 인간적인 방법으로 알 수도 있다. 전자는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후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지금은 오직 외적인 증표들을 통해서만 이 죄를 확인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은 무오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죄를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고, 엄격하게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서 선한 소망을 품고서 접근하는 것이 마땅하다.
프란키스쿠스투레티누스, 변증신학강요 1, 부흥과개혁사, 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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