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산책

존 파이퍼의 이중 구원론적 개념에 대한 비판-이스데반

V.D.M. 이스데반 2020. 5. 18. 20:07

존 파이퍼의 이중 구원론적 개념에 대한 비판

 

https://www.desiringgod.org/articles/does-god-really-save-us-by-faith-alone

https://www.desiringgod.org/interviews/will-we-be-finally-saved-by-faith-alone

 

 

위 두 논설에서 파이퍼는 칭의를 단회적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오직 믿음으로 칭의되지만 최종 구원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행위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파이퍼는 우리의 행위가 최종구원을 결정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되고, 따라서 칭의된 자가 나중에 칭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점에서는 옳다. 그리고 행위를 공로가 아니라 열매라고 하는 점에서도 옳다.

 

그러나 그는 여하간 칭의와 최종 구원을 나누어버리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칭의는 단회적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믿음만이 수단이지만, 최종 구원에서는 행위의 열매가 믿음과 함께 판단된다는 그의 주장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에서 오직 믿음이라고 할 때도, 그 믿음은 근본적으로 행위의 열매를 포함하고 있다. 다만 칭의의 시점에 그 열매가 아직 맺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파이퍼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의롭다하는 믿음과 최종 구원하는 믿음은 다른 것인가?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도 행위의 열매를 낳는 믿음이고 최종 구원하는 믿음도 행위의 열매를 낳는 믿음이다. 다만 전자는 그 열매가 칭의의 순간에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다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행위의 열매가 최종 구원에서 믿음을 참된 것으로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한다면, 칭의되어 성화 시점에 있는 사람에게 행위의 열매는 참된 믿음을 증명해 주는데 필요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의 칭의가 참된 것임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칭의된 사람이라고 할 때도, 이후에는 그의 칭의는 그의 행위의 열매가 그 믿음의 진위 여부를 진단하고, 따라서 칭의의 여부를 진단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바울과 야고보의 진술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고, 최종 구원은 인간의 행위와 믿음 둘 다 요구된다는 식의 구분은 적절하지 않고, 페더럴 비전에 접촉점을 열어줄 뿐이다. 행위가 열매라면 칭의에서도 행위는 곧 맺혀질 열매로서 필요하고 최종 구원에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달받아 의롭다함 받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최종 구원에서도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행위가 열매라면 칭의에서도 후차적인 증명의 차원에서 요구되고, 최종 구원에서도 요구된다. 그러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고, 최종 구원에서는 행위가 요구된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다만 칭의와 구원의 최종 완성이라는 구분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칭의는 믿음으로만이고 최종 구원은 믿음과 행위의 열매를 통해서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을뿐더러 구원이 이중적으로 나누어진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겨줄 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인간의 선행에 대한 권고는 마지막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칭의된 사람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구분되기 보다는 연결된다. 칭의는 시작과 완성이라는 점에서는 최종 구원과 구분되지만 칭의는 믿음으로만, 최종 구원은 믿음과 행위의 열매로 얻게 된다는 구분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여기에 파이퍼 사상의 결정적 오류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칭의에서도 오직 믿음으로만, 최종 구원에서도 오직 믿음으로만이다. 성화는 칭의의 열매요 최종 구원을 바라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고 성화와 최종 구원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칭의와 최종 구원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칭의의 시점에 행위의 열매가 참작되지 않는다고 해서, 칭의 이후에도 행위의 열매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행위의 열매는 소급해서 칭의의 참됨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행위의 열매는 전망적으로 최종 구원을 위해 요구된다. 이는 곧 칭의받는 믿음도 살아있는 믿음이요, 최종구원을 위한 믿음도 살아있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칭의와 최종 구원을 시작과 완성이라는 관점 이외의 다른 도식으로 구별하려는 시도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매튜 풀(Matthew Poole, 1624-1679)은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의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는다."[1]

 

참조: 스콧 클락의 반응

https://heidelblog.net/2018/03/will-we-be-finally-saved-by-faith-alone-sola-fide/

 


[1] 매튜 풀, 『청교도 성경주석: 사도행전·로마서』 (파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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