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축도'는 사전적으로 '축복 기도'의 준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축도를 기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축도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축도'의 내용과 문맥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적 축복'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는 기도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제사장 축복'도 하나님께서 아론을 통하여 "축복하여 말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것도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것을 '축도'라고 한 것은 우리말에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편의상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 표현인 benediction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향한 선언이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닙니다. 축도는 회중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섭리적 보살핌을 기원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둘째, 축도가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축도를 하기 전에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복을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옳습니다. 개혁 교회에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드시고, 주님의 복을 받아,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하고 목사가 회중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고 성경 본문 그대로 축도를 합니다. 이때 성도들도 눈을 뜨고 축복하는 목사를 바라봅니다.
축도를 예배 끝에 사용한 것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성도가 회중에서 떠나면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복과 평강을 가슴에 품고 일상 생활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있었던 것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어주는 하나의 교량 역할을 합니다. 즉 예배에서 경험한 것을 생활로 연결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론도 그런 의미에서 제의를 마칠 때 축복했을 것입니다.
셋째, 아론이 두 팔은 드는 것은 기도와 상관이 없는 행위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이 시편의 내용(시 28:2; 63:4; 134:2)과 연결시켜서 아론이 손을 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관련되고 "성소를 향해서" 팔을 든다고 했기 때문에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축복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기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공식적, 가시적인 행위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손을 안 든다고 해서 효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축도의 효력은 회중의 태도와 관련됩니다. 즉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만 축도의 내용에서 약속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경고의 암시도 들어 있습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합니다.
신득일, 101가지 구약 Q&A, CLC,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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