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십일조는 모세 율법에 속한 것이고,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순전히 자진해서 드려야 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저도 우리가 적어도 구약성경의 신자들이 드린 만큼 드리려면, 자진해서 드려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라고 하는 것 뒤에 숨는 사람들은 이것을 오직 양심이 말하는 만큼만 드릴 자유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구약 성경 신자들보다 훨씬 적게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롭고 싶다면, 구약성경의 신자들로보다 더 많이 드리는 데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십일조는 바닥이어야 하지, 천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는 출발점이어야 하지, 한계점이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시대의 신자는 율법 아래의 신자보더 적게 드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에 대해 "저는 율법 아래 있지 않아요"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율법보다 더 낮은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은헤 아래 있는 것도, 율법 아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수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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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일보다 더 많이 드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와 학교와 선교 단체, 또 그 밖의 일들에 드리는 돈을 다 더하면, 여러분이 번 돈의 십분의 일이 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물론 그보더 적게 드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실패이고,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께 십일조 드리는 일에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했습니다. 반대로 부흥이 올 때 가장 먼저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주님께 십일조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그 뒤로 개혁자 에스라와 느헤미야 아래서 큰 부흥이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주님께 즐거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코르넬리스 프롱크,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터는 없네, 그책의 사람들, 91-93.
스데반의 생각
프롱크 목사님은 십일조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논쟁의 여지를 빗겨가면서 봉헌의 자발성과 적극성이라는 관점에서 납득할만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만 소득의 십분의 일 보다 적게 드리는 경우 심각한 실패라고 한다거나 수치 아래 있다거나 한 표현들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충분히 많이 벌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자극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이 역설적으로 십분의 일 이하를 드리는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 가난한 성도들로 하여금 십분의 일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율법적 의무를 부과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표로서 자원하여 힘껏 드리는 것이 오늘날 봉헌을 위한 유일한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 십분의 일은 우리가 반드시 넘거나 도달해야 하는 기준점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통상적인 기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프롱크 목사님의 지적대로 적게 드리고자 하는데만 적용되는 자유는 아니다. 두 렙돈이든 얼마이든지 간에 봉헌에는 자신의 전부를 드린다는 고백이 함께 담긴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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