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초기 몇 백년 동안에는 예수를 세상 밖으로 완전히 끌어내려고 위협하는 강력한 조류에 전투적으로 맞설 필요가 있었다. 우리 시대에 규칙적으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암송하는 교인들은 그 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부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신학 성명서에서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깨닫지 못한다. 이 신경들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잘 알려지지 않았을 이 지방 총독의 이름이 기독교 고백의 중심에 영원히 보존되어 왔다. 이는 그 고백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성육신 -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반영지주의적인 사건이다 - 의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확고히 해주기 때문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신성모독적인 인물"이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이유는 예수라는 인물의 인간적 삶과 죽음에 관한 지리적, 연대적, 역사적 특수성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다.
플레밍 러틀리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새물결플러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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