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자는 자신을 하나님 안에 흡수시켜, 자기 자신인 '나'를 희생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관상에 매몰되어 자의식을 상실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는 이내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상실하고, 범신론자가 된다. 그는 정적주의자가 되어 평안과 고요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지만, 여기에서 이 교제는 언제나 말씀에 의거한 믿음의 문제다. 관상은 오직 내세에서만 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세에서 이 교제는 이제 더 이상 말씀에 의거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이렇게 정한 것을 무시하고, 현세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하며 관상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는 혼이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의지를 붙드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믿음은 사랑으로 대체되고, 그들은 이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의 합일, 즉 신의 깊은 것 속으로 융합되거나 침잠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이 신비주의이고, 신비주의는 실천적인 측면과 사변적인 측면을 지닌다. 사랑 가운데서의 관상은 사람을 하나님과 합일시키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렇게 해서 내면의 말씀은 지식의 원천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마음을 정화하고, 마음을 가르쳐 이기심을 죽이고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다. 빛을 받으면 정화가 이루어지고, 결국에는 자신을 잃고 하나님 안에 흡수된다. 관상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소리 내어 하는 기도와 구별되는 "정신적인 기도"로 표현된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윤리학 1, 부흥과개혁사, 42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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