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용어는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될 수 있다. 루터파와 로마가톨락교회에 반대해 개혁교회가 중생은 말씀이나 성례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전능하시고 중생시키시는 사역을 통해 일어난다고 항상 고백해 온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나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은 마치 설교와 중생 사역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말씀의 설교로부터 단절되는 식으로 이해하며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신앙고백서(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유아기에 죽는 우리 자녀들의 구원과 관련해 그들이 복음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우리의 신앙고백 표준서들(세 일치 규범)이 어디에서도 우리 자녀들 및 다른 자녀들에게 중생이 일어나는 방식을 그 자체로 표현하지 않지만, 복음이 믿는 자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과 성인의 경우에 성령의 중생 사역이 복음의 설교를 수반한다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의 중생론, CLC, 4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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