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신학자들은 계속 타락 전 예정과 타락 후 예정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예정 교리의 기본 노선에서는 서로 일치되었다. 리처드 십스(1577-1635)는 그들이 타락 논쟁에 빠져 있었던 것과는 상관 없이 그의 모든 동료 개혁파 신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일치했다고 말했다.
첫째, 하나님의 목적 속에 사람들의 영원한 분리가 들어 있었다. 둘째,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람을 분리시키는 이 첫 번째 작정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이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를 거부하신 이유처럼, 특히 상대적인 유기에 있어서, 그렇게 된 원인이 피조물 속에 있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다. 예견된 죄는 원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사람 다 공통적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분리의 원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파멸이 신적 공의의 행위라는 데 모두가 일치한다. 이것은 죄과를 전제로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은 본성이거나 삶이거나 또는 둘 다이거나 간에 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부흥과개혁사 160.
스데반의 생각
십스의 위의 언급은 전택설의 입장에서 전개한 논지로 보인다. 전택설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데 열심이 있으므로, 훌륭하다. 그런데 전택설을 지지하는 분들 중에 후택설의 예정이 창조 이후에 있었던 것이어서 영원전 예정이 아니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후택설도 영원 전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도 저해하지 않는다.
또한 후택설 지지자들은 전택설의 예정이 타락하지 않은 사람(타락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타락 가능성만 염두에 둔)에 대한 것이니, 말이 안된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전택설이 실행의 작정에서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은 또한 분명하다. 다만 논리적 예정의 순서로는 우리 인간의 지성에 후택설이 더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후대에는 후택설로 무게 중심이 기울게 되고, 도르트 신조도 후택설에 무게 중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전택설이나 후택설이나 이런 용어를 칼빈은 사용하지 않았고, 이런 논쟁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전택설과 후택설은 영원 전 예정에 속하는 내용들을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 좋을것인지에 대한 베자를 시초로 한 스콜라적 논지이다. 이렇게 배열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데 가장 보기에 좋고(전택설), 저렇게 배열하면 논리적 개연성에 있어서 더 낫다는 것이다(후택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예정의 내용들이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인데, 인간이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것을 하나님이 이런 논리적 순서에 따라 예정했을 것이라고 나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선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가정은 해 볼수 있겠지만). 그래서 전택설과 후택설의 긴장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에 여기에 소개된 십스나, 마스트리히트, 그리고 아마도 국내 신학자들 중 일부도 중재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이 더러 보인다.
본인도 이런 분들과 궤를 같이 한다. 이 문제로 경쟁을 벌이는 것은 예정론 이해를 촉진하는 일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과열되면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전택설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후택설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실하지 않는다. 후택설이 논리적 개연성이 있고, 전택설이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도르트 신조는 후택설에 중심을 두었고, 고마루스는 침묵했다.
전택설 후택설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 논쟁이 어느 한편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경우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지난 세기들 동안 가장 출중한 신학자들이 보여준 신학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논쟁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높은 이해들을 확인하고, 이 두 논지를 통해서 우리의 이해를 승화시켜서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적으로 높이되,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부분을 인간의 이해 안으로 끌어내려 조직화 내지는 도식화 하려는 지나친 스콜라주의적 열심은 삼가함으로써, 신학이 경건을 낳는다는 사상 속에 우리 자신을 정초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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