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부추기거나 주입하거나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물리적 원인이라고 할 수 없고, 그것을 명하거나 인정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엄하게 금지하고 벌하기 때문에 그 윤리적 원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죄를 하나님의 섭리에서 배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죄는 그 시작과 과정과 결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섭리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의 시작과 관련해서는 자유롭게 허용하고, 과정과 관련해서는 지혜롭게 인도하며, 결말과 관련해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결국 선한 목적에 기여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죄에 대한 섭리의 세 단계다.
첫 번째 단계는 죄의 시작에 대한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허용하는 방식으로 관여한다고 말한다. 이 허용은 법적으로 금지와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완화나 면제로 인해 주어지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죄를 허용했다면, 그것은 죄를 합법적이거나 의로운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부조리하다. 도리어 이 허용은 사실적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과 반대되는,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서 물리적인 것이다.
이 허용은 마치 악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단지 유보하거나 중지하는 것인 듯이 소극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허용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인식해서, 하나님은 단지 죄를 방해하고자 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이것은 소극적 방임이다), 방해하지 않고자 하는 것으로(이것은 실효적 긍정이다)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학자들은 성경과 더불어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칼빈과 베자 등과 같이 이 단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그 고유한 권리를 빼앗아서 그 자리에 자유의지라는 우상을 세우는 펠라기우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방임적 허용이다.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 변증신학강요 1, 부흥과개혁사, 73-774.
스데반의 생각
죄의 허용에 대해서 투레티누스가 지적하는 것은 두 가지다. 1. 허용은 윤리적인 차원이 될 수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선하실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허용은 물리적인 것에만 관여된다. 2. 허용은 소극적인 방임이 아니라, 실효적 적극성을 가진 섭리다.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니가 알아서 원하는 대로 하라든가, 될대로 되라는 식)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적극적 의도와 의지의 섭리다(방해하지 않기로 의도함으로써 실효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협력하신다. 그러나 도덕적인 협력은 아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으면 죄 조차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일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주권성이 허용이라는 단어의 사용에서 결코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을 소극적 방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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