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목회자의 영, 나아가 그의 설교를 비롯해 모든 목회의 스타일과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친다. 매로우 논쟁에서 밝혀진 것은, 신앙 고백의 진리를 토씨 하나까지 다 인정하면서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그 진리들이 살아 움직이지 못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영은 무미건조해 질 수 밖에 없고, 그런 영은 다시 그의 설교와 목회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직신학의 요점이나 구속 역사의 단계는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만, 팔다리와 몸통, 이목구비가 모두 갖추어진 것과 같은 전체적인 생명력이 부족하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해서 꼭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통 신학을 갖추었다 해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의 고난을 조건으로, 나아가 우리의 회개를 조건으로 한 사랑으로 본다면, 그렇게 보는 목회자가 전한 복음은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왜일까? 하나님의 마음을 작게 보는 만큼 설교자의 마음도 작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십중팔구 알렉산더 화이트가 말한 "식초에 의한 성화" 과정을 겪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대개 고집이 세고 날카롭다. 조건적인 은혜에 기초한 목회는 그런 결과를 낳는다. 죄인에 대해서는 사랑이 없는 정론을, 의인에 대해서는 조건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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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이러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깊이 경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방어적인 바리새주의와 조건주의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버려야 한다. 우리 구주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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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목사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교인들에게 어떤 목사인가? 나는 아버지와 같은 목사인가? 혹시 잔치에 참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탕자의 형과 같은 목사는 아닌가? 형은 방탕했던 동생이 죄를 충분히 뉘우쳤는지 따지고 있으니 잔치 자리에 가봐야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아타까웠던 순간 중 하나는 새 신자 환영회에서 '과거'가 있는 한 젊은 유부남에 대해 모범적인 교회 생활로 존경받던 두 '교회의 기둥'이 "저 사람은 왜 왔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순간이다. 옳은 교리를 알아도 탕자들을 조건적인 은혜의 태도로 대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디모데, 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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