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무스 브라켈의 대작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다음은 이 책에 대한 칼빈신학교 리차드 멀러 교수님의 서문입니다.
https://www.facebook.com/jipyung/photos/a.798667280161118/871489579545554/?type=1&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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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브라켈의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Christian’s Reasonable Service)가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개혁신학 대작(大作)들의 목록에 추가되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는 건전한 신학이 있어야 할 자리가 교실이 아니라 교회와 각 신자들의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전체적인 계획 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브라켈의 이 위대한 작품의 원래 서문은 “Ana de Gemeente Gods in Nederland” 곧 “네델란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네델란드 정착민들과 이민자들의 노고와 번역작업을 통하여 브라켈의 신학은 17세기 네델란드라는 경계를 훌쩍 넘어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이제 전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gemeente”라는 단어는 “교제,” “친교,” “공동체,” 혹은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브라켈의 작품은 예배를 위해서 어떤 특정한 예배당에 모이는 어떤 특정한 “회중”들을 향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기에 이 작품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모여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브라켈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는 그 분량이 많고, 많은 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기초적인 과정보다 더 많은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위한 교과서라거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지금껏 역할을 해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옛 개혁주의 전통에서 브라켈의 책은 가정에서 사용되는 책이었지 학교에서 사용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17세기 아카데미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네델란드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분명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신학을 취해서 이를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여, 모든 교리적인 요점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객관적인 진술이 신앙공동체와 그 공동체 속에 있는 각 개인들의 삶과 경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객관적이고, 또 때로는 전문적인 신학의 가르침과 신학이 가지는 기독교적인 실천과의 관련성 및 적용을 서로 결합하는 이런 접근은 브라켈이 참여했던 신앙운동, 곧 일반적으로 제 2 종교개혁, 혹은 더 진전된 종교개혁(the Further Reformation)으로 여겨지는 신앙운동의 중심주제였습니다.
이 주제는 이 운동의 모토였던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토의 의미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은 중세 후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끔찍한 오용으로부터 철저하게 개혁되었거나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교리가 개혁되었다면 각각의 새로운 세대가 올 때마다 신자의 삶을 개혁해야 하는 지속적인 사역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브라켈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 공식의 두 측면, 곧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과 교리를 삶의 개혁에 적용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브라켈은 각각의 섹션에서 특정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기본적인 사항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항을 성경과 관련하여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 때 성경은 기독교 가르침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근거의 자격을 가집니다. 그 후에 이 책은 모든 세대를 통해 교회가 가르쳐온 전통적인 가르침과 용어들이 가진 중요한 측면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자주 소위 “스콜라적” 형식의 가르침을 반영하며, 또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반박들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잘못된 가르침들을 논박하기 위한 목적에 맞게 계획된 것으로서, 자신이 제시하는 바에 대한 반박과 그 반박에 대한 답변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 분명한 관계성을 가지도록 하는 그 교리에 대한 일련의 활용과 적용을 하는 작업을 펼칩니다. 이러한 패턴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 전반에 걸친 일관된 모습이라는 것과 이 패턴이 전체적으로 아주 강력하고 실천적인 구성과 강조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브라켈이 쓴 이 작품의 중점이 은혜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줍니다. 정통시대의 개신교 신학에 대한 현재의 작품들을 보면, 스콜라적 방법과 기독교 경건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는 삶과 실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브라켈의 작품은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잘 짜여진 스콜라적 혹은 학문적(academic)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위한 견실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또한 신앙의 실제적인 측면을 계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또한 보다 더 교리적이고, 혹은 조직적이며, 아니 실로 스콜라적인 차원도 역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실천적인 신앙이 오직 평신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듯, 교리적 신학도 단순히 성직자들과 교수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 보입니다.
브라켈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사상과 신앙의 이 두 측면을 분리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인식적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와 실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더치 제 2 종교개혁 혹은 나데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 신학이 가진 특징이며, 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브라켈 신학의 구조와 조직을 보면 이 주장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브라켈의 경우와 같이 많은 신학작품들이 신론과 창조론과 더불어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과 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한 차원들로 논의를 전개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 후에 보통의 교과서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순서는 믿음과 칭의와 전체 구원론에 대해서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교회에 관한 교리와 종말에 관한 교리로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브라켈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들을 다루자마자 곧바로 교회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종말에 관한 교리들을 다루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구원에 대하여 다룹니다.
이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가진 회중 혹은 모인 공동체에 대한 강조점과 실천적인 목표에 대한 모습이 이 순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제시한 이후에 브라켈은 구원이 설교되는 공동체인 교회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그는 구원을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맥락 가운데 있는 율법에 대한 그의 논의는 아주 중요한 사항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개혁교회의 유산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설령 우리 모두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 율법을 우리 삶의 척도요 표준으로 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삶을 위한 실제적인 규칙으로 율법을 바라본 후에, 브라켈은 개인기도,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에 대한 반성, 이웃사랑, 겸손, 온유, 근면, 동정 등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확장된 여러 측면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믿음과 구원 안에서 마지막까지 인내하는 것을 다루는데, 곧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서 매우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고 또 그런 칭찬을 받아야만 하는 작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서 평신도와 성직자 또한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회의 회중들과 그들의 목사들 모두가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리처드 A. 멀러
칼빈신학교
미시건주 그랜드 래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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