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하나님과 반드시 화목해야 할 것을 간청해야 합니다. 웅변술은 탄원이며 드라마이자 행동입니다. 결국 웅변술은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것 그 이상입니다. 웅변술은 투쟁이요 분투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신의 청중과 씨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청중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는 청중들이 스스로 포기하고 그들 자신을 내어줄 때까지 이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반대를 제거하고 모든 핑계를 물리치고 모든 탈출구를 봉쇄해야 합니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중들을 앞뒤좌우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좁은 곳으로 그들을 몰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오직 도움을 구해야 할 곳, 하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말씀 사역의 엄중함과 무거운 책무는 그 설득의 과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무엇보다도 논증과 예증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럼에도 개혁파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과업은 비록 무거워도 감당할 만한 것입니다. 만일 회심이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며, 의지가 그 자체로 마음의 내용을 점령할 수 있다면, 복음 설교는 사람이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청중들의 의지를 굴복시키지 못하는 각 설교는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노력과 근면을 반대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자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더 강력한 말과 진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여러분의 웅변술로 인간의 의지가 구부러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그렇게 해서는 꺾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의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하시기 때문에, 오직 그것으로 인하여 웅변술의 설득력 있는 요구는 비로소 설교자가 책임질 수 있는 과업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말씀 설교에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기에, 목사의 말은 그저 성령의 전능한 손 안에 있는 수단일 뿐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다함, 108-109.
스데반의 생각
우기는 설교자는 보았어도, 복음의 설득을 진지하게 하는 설교자는 내 생에 직접 본적은 없다. 개혁파 설교자는 반드시 이러한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옛 개혁파 설교자들은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스펄전은 이 점에서 대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옛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읽고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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