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정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호기심을 증폭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대단한 신중함과 사려깊음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성경이 정한 경계들 내에 머물러야 하고, 기록된 것 이상으로 지혜롭고자 해서는 안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장소와 시간을 지혜롭게 고려해서 가르침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무턱대고 단도직입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서서히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리의 모든 부분을 똑같이 가르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선택과 같이 경건한 자들의 위로를 위해 좀 더 유익하고 합당한 것들은 더 자주 강조해서 가르쳐야 하는 반면에, 유기와 같은 것들은 가끔씩만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리는 이미 교회에 속해 있는 기존의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하지만, 갓 교회에 들어온 초신자들에게는 아직 가르쳐서는 안 된다.
또한 예정은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후험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즉 원인에서 결과로 추론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호기심으로 그 책을 훔쳐보려고 해서는 안되고(이것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이 친 인이 우리의 심령에 각인되어 있는지, 선택의 열매들(즉 믿음과 회개)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지를 알기 위해 "양심의 책"을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허용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한 것이기도 한 것이어서, 예정론에 대한 구원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기서는 호기심에서 나오는 온갖 열매 없는 질문들을 피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것을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라고 부르며, 통상적으로 거기에서 다툼과 분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딤후 2:23).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덕 세우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 변증신학강요 1, 부흥과개혁사,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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