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생각
이승구 교수님의 영접기도에 대한 해설은 건전하다. 다만 본인은 이승구 교수님의 해설에 동의하면서도 좀 더 무게 중심을 다르게 두면서 첨언하고 싶다. 즉 '영접기도'라는게 교회사적으로 개혁교회와 올바른 교회 안에서 참되게 존재해왔는가라는 점에 비중이 요구된다. 비록 요한복음 1:12을 중심으로 그리고 많은 잘못된 사람들과 달리 참된 신학자답게 복되게도 중생과 연결하여, 즉 1:13절과 연결하여 설명해 주신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영접기도의 시작과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된 배경들이 다루어지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혹 편집에서 잘린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영접기도'라는 것이 원래 교회 안에 있었고, 그것이 원래 부터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아니면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온 교회의 것이었고 그렇게 인정받아 온 것인가라는 점에 답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접기도의 오늘날 문제를 바르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영접기도'라는 것은 샌디맨주의의 변형으로서 세미펠라기우스주의와 혼합된 신-샌디맨주의에서 비롯된 이른바 인스턴트 전도법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다.
또한 이런 질문을 R. C. 스프로울에게 한다면, 바빙크에게 한다면, 칼빈에게 한다면, 예수님께 드린다면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바울의 전도사역을 보면 어떨까? 그는 전도여행을 통해서 영접기도를 시키면서 몇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보고하고 있는가? 그러나 실상 오늘날 소위 말하는 단기선교와 전도훈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교회의 참된 복음 전도를 어떻게 저해하고, 위축시키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고 개혁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인식하는 목회자, 신학자라면 누구든지 이런 오류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학과 목회/선교 현장 사이의 괴리는 믿음의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신학교에서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라서 참된 믿음의 3요소로서 notae, assensus, fiducia를 온당하게 가르친다. 그러나 목회/선교 현장에서는 복음의 일부 요소들에 대한 몇 가지 내용을 전한 후에 영접기도로 이끌어내고, 통과한 사람에게 확신의 메시지를 전도자가 심어주기까지 한다. 참된 믿음의 3요소가 가르치는 바는 성령의 역사로 fiducia에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목사/선교사의 임무라는 점인데, 이 적용이 현장에서 엉뚱한 인본주의적 전도방법에 의해 뒤틀려버린 것이다. 이런 결과가 가져온 영적인 황폐화는 수치로 통계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학의 기초와 그것의 올바른 적용(이론과 실천의 조화)은 심대하게 중요한 일이다. 영접기도를 함으로써 첫 믿음생활을 시작한다는 개념은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쳐서 써야할 문제가 아니라 폐기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영접기도의 구도자체에 펠라기우스 계열의 함정이 덫을 놓고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선조들이 이런 도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사용을 장려한 경우가 있는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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