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또한 각 사람의 불의의 정도에 따라 그 형벌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여전히 회개와 용서의 여지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덧붙여진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라는 문구는 인자를 거역한 죄가 여전히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형벌은 본질상 공의를 유지하는 것이며, 특별히 심판 후에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그 행위에 따라 징벌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런 형벌의 정도가 다양하다고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 저주의 형벌(poena damni)은 똑같지만, 감각적 고통(poena sensus)은 다른다.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받는다(마 10:15, 11:24, 23:14, 24:51; 눅 10:12, 14, 12:46-47; 고후 5:10 등).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어떤 자비하심을 선언한다. 모든 죄는 절대적으로 공의에 반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벌을 주는 데 있어서 죄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차이를 고려한다. 무덤 저편에도 끝없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도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은 손상되지 않고 결코 정당한 비난을 받지 않는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는 말씀은 지옥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보내는 고통은 자신이 기뻐하거나 천국의 복된 자들이 기뻐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미덕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따라서 이 궁극적 목적에 의해 그 크기와 무게가 정해진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부흥과개혁사, 848-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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